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실을 아예 부정하는 것은 흔한 반응이었다.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전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런 고약한 거짓말을 할 수 있냐고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어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 죽음을 부정하는 그 애처로운 저항은 사람을 현실에서 격리시켰다. 사이퍼 폴이 그런 착란을 일으킨다면 당장 무기한 휴직 처분을 받았다. 현실 파악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공무를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라스키는 스팬담에게 부고를 전하며 각오를 했다. 그가 욕설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져도, 아이처럼 엉엉 울어도, 아니면 아예 죽음을 부정해도 그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누구세요?"
그렇지만 모든 걸 통째로 잊어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스팬담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의 평생을 살아온 자기 집의 구조 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침착했고, 차분했으며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금방 이해했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 거부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거부했다간 그의 유언을 지킬 수가 없다. 장관이 죽은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장관직을 이어받을 수 없을 테니.
"장례식에선 뭘 해야 하나요?"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된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나요?"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부정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래서 슬픈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라스키는 울어도 된다고 말했으나 그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스팬다인의 초상화를 볼 때도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라스키는 저도 모르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고, 슬픔에 잠겨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취임식 때 상복을 입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것이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이 슬픔을 표현하는 법이었다.
*
취임식이 끝나고 나서, 나는 매우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라스키. 나 이거 못 읽겠어."
"이해 못하는 게 많아도 그게 당연한 겁니다. 인수 인계 받을 시간조차 없었으니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도와드릴 거니까요."
어떤 부분을 모르겠습니까? 라스키가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어딜 모르겠냐고 물어봐도...
...이거 전부 영어로 써있는데요. 제목부터 못읽겠는데. 나는 낯선 단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단 이거..."
"예산 분석 보고서, 라는 것은 예산이 어떻게 적절히 사용되었는지 조사한 글이라는 뜻입니다. 아, 예산이 무엇이냐면-"
"아니, 예산이 뭔지는 알아."
"그럼 예산 분석에 대해서 물어보신 겁니까? 예산 분석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행정 절차에 대한 지침이 있습니다. 가져다 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 그냥 이 단어를 예산이라고 읽는 지 몰라서 물어본 거야."
내 말에 라스키는 안경을 밀어올리던 채로 굳었다. 어... 저기요?
"들으면 아는 단어인데, 읽는 법을 모르겠다는 겁니까?"
라스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아니, 그야 한국어로는 알고 영어로는 모르는 단어니까. 당연한거 아냐?
라스키가 종이에다가 뭐라고 끼적여서 나에게 보여줬다. Spandam... 음. 영어로 봐도 참 거지같은 이름이야.
"이건 읽으실 수 있겠습니까?"
"스팬담... 이라고 쓴 거지?"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라스키가 그 옆에다가 뭐라고 휘갈겨 썼다. A Status Report. 스테이터스... 스테이터스 그거잖아. 상태창. 리포트는 보고서니까...
"상태 보고?"
"...비슷합니다만, 이건 현황이라고 읽습니다."
"뜻은 맞는 거 아냐?"
라스키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그러시죠. 라스키는 다른 단어를 썼다. String.
"읽어보십시요."
"끈?"
"...이건 현이라고 읽습니다."
아. 바이올린 같은 데 거는 것도 스트링이라고 하지. 근데 끈도 맞잖아. 내가 항의하기 전에 라스키가 다른 단어를 썼다. Surfur. 이건 뭔지 모르겠는데.
"모르겠어."
"그냥 발음만 해보십시오."
"설퍼?"
"이건 황이라고 읽습니다."
유황 할때의 그 황인가? 들어봤던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스펠링대로 읽어도 안되는 모양이었다. 라스키는 나에게 펜을 내밀었다.
"제가 쓴 두 글자를 합쳐서 써보십시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옮겨썼다. String Surfur. 그리고 그걸 본 라스키는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그대로 썼는데. 두 번째 단어 스펠링이 틀렸나? 라스키는 아까 썼던 두 단어를 잘 보이게 내 앞에 놓았다. 응? 보니까 안 틀렸는데.
"이번엔 보고 써보십시오."
"똑같은데."
내가 다시 같은 글자를 쓰자 라스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보고 썼는데 뭐가 문제야.
"...틀렸어? 뭔가 이상해?"
"이게 뭐라고 읽히십니까?"
"현...황이라며."
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설마 이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걸 맞게 쓰면 이런 단어입니다."
Status. 라스키가 쓴 것을 보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어? 파파고냐? 파파고에 한번 돌리고 출력되는 건가?
밥 rice
밥은 먹 bob is china ink
밥은 먹고 다니냐? how are you?
이렇게 되는 거냐고. 어?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라스키와 몇십개의 단어 테스트를 더 하고 나서 그 설마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딴 언어를 어떻게 익혀 시발.
"...아무래도 충격으로 인해 기억 상실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 문제도 같이 생긴 것 같군요."
"어떡하지..."
"당분간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라스키가 계속 옆에 있을 수는 없잖아. 이대로면 나는..."
...낙하산인데 글도 못읽는 장관인 거잖아. 시발. 지금 나 원작 스팬담보다도 머저리인 거 아냐? 걔는 최소한 문맹은 아니었을 거 아냐.
"아뇨, 제가 계속 옆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라스키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토닥였다. 나는 조금 찡해졌다. 라스키... 모자란 새끼 케어하느라 고생이 많다. 나라면 상사 아들이 기억상실 와서 나는 누구?? 할 때 손절했을텐데.
근데 진짜로 괜찮은가? 기억상실에 글도 못 읽는 애를 장관으로 앉혀도? 나라면 절대로 그런 머저리를 모시진 못할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남은 왕의 혈통 그런거여도 그놈을 왕에 앉히느니 역성혁명을 일으키겠다. 걔한테 뭘 믿고 나랏일을 맡겨.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나부터 열 까지."
앉아있는 나에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 꿇고 있는 라스키의 얼굴은 퍽이나 다정해보였다. 그러고보니 라스키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러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어려움이 있어도 너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라스키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장관으로서, 잘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라스키의 말에 나는 갑자기 오싹해졌다.
혹시 나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본인이 마음대로 장관 일을 할 생각이어서 다정하게 구는 건가? 그건가? 수렴청정? 그리고 뭐가 문제 생기면 나만 꽥이고?
뭐, 지금 내 상태로는 그렇게라도 해주면 감지덕지긴 한데... 그러면 로빈 누님을 지킬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혼자서도 문제 없도록 노력해야해."
라스키의 손이 잠깐 멈췄다. 나는 그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얼른 덧붙였다.
"...그래야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겠지."
라스키는 다시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알겠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음.
아니 근데 시발 어쩌지. 이대로면 뭐 내가 라스키 몰래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 아냐? 모든 보고를 라스키를 통해서 듣고 보내고 해야 하는 거면?
"읽어드릴 테니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라스키가 보고서를 읽어주는 동안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로빈 누님을 안 죽일 수 있지? 니코 로빈을 죽이지 말자고 하면 라스키는 '저런... 불쌍하게도... 완전히 돌아버렸군' 하고 생각하며 앞에서는 나에게 그러겠다고 다정하게 약속하고 뒤에서는 죽여 없앨 것이었다. 그리고 나한테만 모른 척 하겠지. 왜냐면 니코 로빈은 그 마지막 임무의 가장 큰 오점이니까.
"지루하십니까?"
라스키가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해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시바 깜짝이야.
"아, 아니야. 듣고 있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시는 거 같아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냥 라스키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어."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라스키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일단 집중해야지. 라스키한테 미안하니까.
*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밤새 고민했다. 로빈 누님을 구하는 것은 대충 두 가지 루트가 있었다. 첫번째는 로빈 누님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라스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이유야 어떻게든 지어내야지. 일단 로빈이 고고학자가 아니고, 포네그리프도 읽을 줄 모르는 어린애일거라고 설득한다든가. 그것보단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생각해야겠지만.
어쨌든 이런 말이라도 꺼내보려면 일단 아버지 죽음에서 허우적대는 머저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좀 멀쩡해보여야 하는 말을 들어보기라도 할 것 아닌가. 아버지가 죽어서 기억상실에 글자도 못읽는 문맹이 되어버린 애가 아버지 원수는 안갚아도 될 거 같아, 라고 말하면 설득력이 있겠냐고.
글 읽는 거야 뭐 어쩔수 없으니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라스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장관의 일을 훌륭하게 해낸다던가.
...근데 시발 그걸 어떻게 하냐고. 내가 미래를 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화에 나온 부분만이다. 대부분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에 일어날 일들이란 말이다. 시바 한숨이 절로 나오네. 일단 지금은 뭐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루트는 로빈 누님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내 말이라면 뭐든 따르는 내 편이 있다면야 좋겠지만 라스키와 상관없는 내 편을 만드는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으니... 남는 건 아오키지, 아니, 쿠잔 중장을 설득하는 거다. 일단 쿠잔이 로빈을 살렸으니까. 그 이후로 그냥 지켜보기만 했지만. 싸이코 새끼.
아니 시팔 근데 진짜 생각할수록 등신같네. 쿠잔새끼 진짜 도라이 아냐? 8살 여자애가 범죄자 취급당하며 평생 쫓겨다니는 걸 그냥 지켜보다가 어휴 맨날 배신하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좀봐 그냥 너는 죽는게 낫겠다 내가 죽여줄게 하는 게 진짜 시팔 사탄새끼 아니면 뭐냐고. 쿠잔 진짜 싸패새끼. 니도 그렇게 범죄자 되서 쫓기면서 진정한 동료 만들어봐라. 해군에서도 진정한 친구 없는 거 같은 새끼가 시발.
그 도라이를 어떻게 설득한담. 마음같아선 멱살 잡고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짤짤 흔들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스팬담은 니코 로빈을 아버지의 원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야 하니까.
내가 쿠잔 중장이 니코 로빈을 살려보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운이라도 떼면 쿠잔은 나를 무지막지하게 경계할 것이었다. 내가 그걸 약점으로 잡고 아버지의 복수라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까 그 이전에 나는 아버지가 죽은 것에 별다른 유감이 없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근데 시발 그건 또 어떻게 하냐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죽은 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고 진실을 말해도 다들 '가엾게도...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너무 커서 돌아버렸군...'하고 보는데 시발 뭐 더 어떻게 하란 말이야.
...차라리 멍청한 장관행세하며 로빈이 진짜로 잡힐 것 같은 상황일때마다 방해해서 막는 게 그나마 가능성있겠다. 근데 라스키라면 처음은 그렇게 실패해도 두번째는 나에게 말도 꺼내지 않고 시도할거 같단 말이지. 로빈 누님은 대단하시니까 그런 위협에서도 다 살아남으시겠지만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지금 할 수 있는 거나 최선을 다해야지. 멀쩡한 척 하기 말이다.
오늘 일정은 뭐였더라. 어느 왕국에서 대관식이 있다고 했나. 가서 자리에 앉아있다가 나중에 박수만 좀 쳐주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쉬운 일이니 다행이지만 좀 귀찮기도 했다. 나 없어도 돌아가는 일이면 몸이 안좋다고 하고 안 가면 안되나?
그렇지만 라스키라면 정말로 그래도 된다고 할 것 같아서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픈 장관'은 곧 '무능한 장관'이니 그럴 수야 없지. 멀쩡하게 보여야 하니까.
라스키가 매어준 넥타이를 괜히 만지작거려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창백한 얼굴은 아직도 낯설었다.
"스팬담 장관님."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온 라스키는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라스키. 왜, 무슨 일 있어?"
화났어? 내 말에 라스키는 곧바로 미간을 풀었다.
"아니요, 해군 쪽에서 일을 어처구니 없이 처리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카즈키 중장을 이번 일에 배치하다니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라스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새 배편을 수배하겠습니다."
"오래 걸릴까?"
"한 시간 정도는 늦을 겁니다."
"그럼 됐어. 그냥 타고 간다고 하지 뭐."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괜찮아."
물론 사카즈키는 졸라 껄끄럽지만, 뭐. 같이 임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동행하는 것 뿐인데. 굳이 새 배를 요청하면서 유난을 피우고 싶진 않았다. 사카즈키도 굳이 대놓고 거절당하면 기분 좆같을 거 아냐. 나한테 별 생각도 없을텐데. 라스키가 얼굴을 굳혔다.
"...장관님이 새 배를 요구하는 건 정당한 처사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해당 배를 편성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런 일엔 참지 말고 화 내셔도 됩니다."
"화 안났어. 내가 왜 화를 내야 하는 데?"
"그야 사카즈키 중장은..."
"내 아버지 죽음에 책임이 있지. 알아."
스팬다인이 어떻게 뒤졌는지는 라스키가 설명해줬다. 솔직히 말해서 듣자마자 스팬다인 등신새끼 죽어도 싸네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렇지만 사카즈키 중장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 뿐이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고.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 인간을 그렇게 생각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 뻔뻔한 놈은 자기 책임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요!"
라스키는 분노한 것 같았다. 음. 진정해.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죄책감이라도 느껴야 하는데, 그 인간은 심지어 장례식때도..."
"라스키."
나는 라스키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책임이 없다면,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어."
"하지만, 장관님."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책임이 없어. 모두가 최선을 다했어도 운이 나쁠 수도 있지."
그러니까 라스키도 죄책감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 말에 라스키는 내 손을 꽉 쥐었다. 음. 이 말 좀 멀쩡해 보였나? 막 아버지 죽음 극복한 거 같고?
"...장관님."
라스키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오지 않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다. 나는 그 분위기가 뻘쭘해서 아무말이나 했다.
"아, 물론 라스키는 아버지의 일엔 아무 책임도 없지만 나 도와주기로 약속한 건 나랑 약속한 거니까 끝까지 도와줘야 하는 거 알지? 물론 그러기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라스키가 없으면..."
라스키가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는 바람에, 나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뭐야.
...저기요. 울어요? 왜?
...모르겠다. 도대체 내 말이 뭐 어떻게 들렸기에 그러는 거지. 어쨌든 멀쩡해보이는 건 실패한거 같다. 아무래도 존나 불쌍하게 보인 모양인데. 음.
나는 라스키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좀 그쳐라... 뚝.
*
"반갑습니다. 스팬담 장관. 이 배의 책임자인 사카즈키 중장입니다."
댁 표정은 눈곱만큼도 반갑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이번 항해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대화의 끝이었다. 나는 선실을 안내받았고, 사카즈키와는 더 말을 섞을 일도 없었다. 참 다행이었다. 같은 공간에라도 있어야 했다면 위에 구멍이 났을 거야.
"거기까지 가는덴 얼마나 걸릴까?"
"만 이틀 정도입니다."
"오래 걸리네."
"그랜드라인에서 이정도면 매우 가까운 거리입니다."
"아, 그런가. 이렇게 나가본 게 처음이어서..."
"......"
"아, 혹시 나가본 적 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 하긴, 그렇겠지. 평생 한 섬에서 산 게 아니면..."
"...네, 그렇습니다."
아니, 왜 목소리가 잠기는 건데. 이정도 말에도 갑자기 슬퍼지는 거냐고. 그냥 말을 말아야지.
"가는 길에 문제는 없겠지? 해적이 나온다든가."
"해군 중장이 있는 배에 시비를 걸 간 큰 해적은 없을 겁니다."
"하긴. 그 무자비한 사카즈키 중장이 탄 배니까 더 그렇겠다."
그래도 안심이네. 자기가 탄 배를 희생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라스키. 왜 갑자기 고개 돌리고 있어."
"아뇨, 눈어 먼지가 들어가서."
"으응... 그래. 서류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좀 쉬어야겠다. 눈 아프면 안 되지."
"아뇨, 읽어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라스키가 얼른 서류를 꺼내들었다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하루 이틀 안에 익숙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응.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이런 시간에는 쉬어도 됩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라스키가 말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 아니, 진짜로 딱히 할 게 없어서 하자는 건데. 아침 6시에 등교하고 11시에 하교하던 고3기준으로 보면 지금 거의 팔자좋게 노는 거고.
"별로 무리 안 해. 난 괜찮아."
"장관님."
"아, 라스키가 무리하고 있는 건가? 미안해. 그 생각을 못 했어. 나 도와주는 거에 더해서 다른 일도 해야 할테니 바쁘겠지."
라스키 얼른 쉬어. 내 말에 라스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나를 빤히 보았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장관님도 같이 쉬십시오."
"으응."
나는 라스키가 서류를 다시 정리해서 집어넣는 것을 가만히 보았다. 음... 근데... 쉴땐 뭘 해야 하는 거지? 여기 인터넷도 안되고 스마트폰도 없는데.
"저기, 라스키."
"네, 장관님."
"...쉴 때는 뭘 하면 좋을까?"
내 말에 라스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음... 그렇지. 뭐 어쩌라는 거지 싶겠지. 미안합니다. 바보같은 걸 물어봐서. 나라도 누가 쉬는 시간에 뭐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겠다.
"같이 갑판에 나가 바람이라도 쐴까요."
앗, 아니 그렇게 신경써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애 돌보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나는 라스키에게 좀 미안해졌다.
*
첫 날은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문제는 둘째 날에 일어났다.
'콰앙'
"습격이다!"
선실 안에서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막 뛰어다니는 소리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나는 침대 위에서 다리를 꼭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시발 해군 중장이 있는 배에 덤비는 간 큰 해적놈들 도대체 누구야.
"괜찮을 겁니다, 장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걱정은 안 하는데. 그 사카즈키고. 그냥 이런 일은 처음이라 좀 쫄은 것 뿐이야.
"사카즈키 중장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고 불리는 인간이니까요. 그가 금방 처리할 겁니다."
"무시무시한 별명이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마그마그 열매로 배를 통째로 볼태워버리면 그걸 어떻게 당해내겠어. 지옥을 연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라스키가 말했다.
"방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배 밑에서 배를 뜯고 들어와있으니 사람들이 무서워 할 만도 하지요. 그와 마주한 해적선은 모두 바다 속으로 침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배 밑에서 공격을 한다고? 잠수를 해서?"
"예. 어인이 아니고서야 배 아래서 하는 공격에서 방어하기란 어려우니까요."
"아니, 그게 가능해?"
"그래서 다들 사카즈키 중장이 어인과 혼혈이 아니냐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중장 앞에선 절대로 그런 이야기는 안 꺼내지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악마의 열매 능력자는 아예 수영을 못하잖아. 어인도 맥주병 되는데? 나는 물어보기 직전에 곧 깨달았다.
아. 사카즈키가 아직 안 먹었을 수도 있구나.
다행이다. 물어보면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할 뻔했어. 그나저나 마그마그 열매를 안 먹은 사카즈키라니. 뭔가 이상한 느낌인걸. 지금이 원작 전이라는 느낌이 팍 난다.
아오키지는 얼음얼음 먹어서 중장인데 사카즈키는 자연계 열매 없이도 지금 중장인건가? 사카즈키 역시 졸라 무서운 새끼.
"...무선이 끊겼습니다. 직접 상황을 파악해야겠습니다. 장관님. 제 손을 잡으십시오."
라스키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뭐야. 지금 안 좋은 상황인거야?
"그, 나는 방해만 되지 않을까?"
"선실에 있으면 고립될 수 있습니다."
나는 얌전히 라스키의 손을 잡았다. 라스키도 CP9인데 뭐 해적들 사이에서 짐덩이 하나 지키는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그리고 갑판 위로 나가자 마자 나는 기절할 뻔 했다.
시발 피가! 시체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걷다가 넘어질 뻔 했다. 라스키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계십시오. 눈을 감고 계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못 견디면 장관으로서... 시발 알게 뭐야.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난 무서운 거 진짜 못 본단 말이야. 졸라 한심해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시발 지금은 그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무서워서 지리겠다고 시발.
"라스키. 지금 상황이 안 좋아?"
"생각했던 것 보단 안 좋습니다."
시발 사카즈키 새끼는 뭘 하는 거야. 라스키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적선이 이미 침몰했는데 적들이 폭약을 쓰고 있습니다."
뭐야 미친 거 아냐? 지들이 무슨 어인이라도 된대? 이 배도 가라앉으면 망망대해에서 어쩌려고? 라스키가 이어서 말했다.
"다른 해적선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거나 아니면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온 놈들이란 뜻입니다. 어느쪽이든 좋지 않은 상황이지요."
콰앙! 폭음이 귀를 찢을 것 같았다. 나는 라스키를 꽈악 끌어안았다. 무서워.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습니다."
최소한 장관님을 인질로 잡으려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라스키의 목소리는 침작했지만 나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냥 시발 다 죽여버리려고 온 거라잖아. 꿈도 희망도 없는 거 아냐? 사카즈키 시발새끼 쓸데없이 원한도 많이 사고 다니는 개새끼같으니라고.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은데 시발. 지금도 저렇게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마지막으로 확인된 연락에 따르면 지원이 곧 오기로 되어있습니다. 20분 내로 올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배가 다 침몰하면..."
"그래도 장관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제가 구명선을 띄울테니 그 때까지 아래서 기다리십시오. 라스키가 말했다. 잠깐, 뭐라고? 어디서?
라스키가 나를 훅 밀쳤다. 첨벙. 물이 온 몸을 때렸다.
시발 뭐야 죽고 나면 괜찮을 거란 소리였냐? 어? 아무리 방해된다고 해도 물에 던져버리는 건 좀 심했잖아. 나는 수영 못한다고! 스팬담 새끼는 할 줄 알았어도 난 못 한단 말이다!! 나는 위로 올라가려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발목이 뭐가 묶인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숨이 차서 입을 벌려 물을 들이키고 말았다. 안돼, 폐에 물이 차면 익사해버릴 거야. 나는 입을 담고 숨을 참으려고 애썼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어라?
나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목을 더듬었다. 거기서 물거품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살갗이 갈라져 있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건... 뭐라고 해야하나. 그래.
"아가미...?"
시발 왜 아가미가 달려있는 건데? 곧이어 내가 물 속에서 그냥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 옆으로 물이 새는 기분 참 미묘하네. 근데 나 아가미 풀 같은 거 안 먹었는데. 물론 그건 장르도 다르지만.
그리고 나는 내 다리를 보고 기절할 뻔 했다.
시발? 왜 생선 반토막이 붙어 있는 건데? 이게 뭐지? 스팬담 새끼 물고기물고기 열매라도 먹은 것인가? 언제? 왜?
아니, 열매를 먹었다면 맥주병이 되어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변화는 악마의 열매랑은 상관없는 종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결론에 얼굴을 구길 수 밖에 없었다.
...시발 내가 반물고기라고? 왜? 물론 일반적으로 인어라고 부르는 건 알고 있지만 스팬담 새끼와 인어라는 단어를 절대로 결합 하고 싶지 않았다. 상디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을 거라고. 인어를 모욕하지 마.
어쨌든 반물고기라는 건 부모님 중 한명이 반물고기라는 거잖아? 그러면 뒤진 스팬다인 새끼가 반물고기거나 반물고기랑 결혼한 새끼라는 건데... 으 어느 쪽이든 극혐이군.
나는 위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깊이로 내려가서 생각했다. 흠. 어쨌든 반물고기라는 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제일 빠른 생명체라며? 그러면 무슨 일이 있을 때 도망치기 쉬울 거 아냐. 이런 상황에서도 바다에서 숨어있을 수도 있고. 이건 좀 징그럽지만. 나는 내 꼬리 지느러미를 움직여봤다. 으. 이상해.
라스키는 내가 반물고기라는 걸 알고 던진 거겠지? 근데 그럼 미리 좀 알려주면 안 되나. 존나 놀랐잖아. 그런데 라스키는 괜찮겠지?
빛이 비치는 수면엔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절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시체는 물 위에 떠서 참 다행이야. 아니면 죽은 시체가 천천히 가라앉는 곳에서 기다려야 할 뻔 했어.
그 와중에 계속 가라앉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배라도 찔렸는지 붉은 피가 긴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뭐야 시발. 오지 마.
시체인가? 아니면 아직 살아있나? 살아있으면 구해줘야 하나? 나는 살짝 가까이 갔다가 가라앉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시발.
시발 사카즈키. 왜 니가 가라앉고 있어 미친. 니 어인급으로 수영 잘한다며. 눈뜨고 뒈진건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발. 시체면 건져야 해? 근데 아카이누가 지금 죽어도 되나?
뭐, 안될게 뭐야. 스팬다인도 원래는 살아있어야 하는데 여기선 처음부터 뒤졌잖아.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지. 기다리면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온다는 속담이 너무 그대로 들어맞는 거 아닌가? 딱히 원수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나는 사카즈키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시체인지 반시체인지 몰라도 어쨌든 제 몸도 못 가누는 상태인데 그런 인간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간 당연히 해적들에게 표적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안 구하는 건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응. 딱히 너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라고. 내가 살려고 하는 것 뿐이지.
그 순간 수면 위가 얼어붙었다. 아이스 에이지. 온다는 지원군이 쿠잔 중장이었나.
음. 이러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이 상황에서 구하지 않는 건, 살인이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게 사카즈키 중장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그 손을 잡았다.
시발 이새끼 의식이 있잖아. 내가 구할까 말까 고민한것도 다 본 거 아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시발. 알게 뭐야. 구해주고 나서 뭐라고 하면 구해준 거에나 감사하라고 해야지.
아직 얼어붙지 않은 수면 위에, 작은 구명보트가 떠 있었다. 해적선에서 떨어져나온 건지 아니면 라스키가 띄워놓은 배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사카즈키를 그 위로 밀어 올렸다. 시발 졸라 무거워. 다행히 사카즈키는 배 위로 기어 올라갈 정도의 힘은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곧이어 내가 올라가려고 낑낑대는데 사카즈키가 가볍게 휙 들어서 건졌다. 음. 혼자서 할 수 있었는데.
나는 배 위에서 꼬리 지느러미를 한번 퍼덕였다. 거 참 물 위에서 보니 꼭 월척이라도 된거 같군. 사카즈키는 제 정의 코트를 내 위에 둘러서 꼬리를 가리게 해줬다. 아 그렇지. 다리로 돌아가면 하의 실종이니까 흉한 꼴 보이지 말라는 거군.
"...왜 구한 거지?"
뭐 어쩌라고. 그냥 뒈지게 놔둘 걸 그랬나?
"그러는 중장님은 헤엄도 잘 치신다면서 왜 가만히 가라앉고 계셨습니까? 그래서 시체인 줄 알았는데요."
"...이번 습격은 나에게 복수하러 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바다의 저주를 받으라고 하며 질퍽이는 반죽 같은 것을 내 얼굴에 던졌다."
"그래서요?"
"그게 악마의 열매였다."
머릿속에 그 열매의 이름이 떠오를 땐 늦었지. 사카즈키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뭐? 악마의 열매를 그런데다가 써먹어? 도대체 얼마나 큰 원한을 산거야.
잠깐. 그러면 혹시 다른 열매인가? 막 엄청 쓸데없는 열매 먹은 거 아냐? 솜털솜털 열매 같은 거...
"무슨 열매인데요?"
"...마그마그 열매라고 하는 군."
"허. 자연계 열매를 고작 바다의 저주 받으라고 써먹었다구요?"
차라리 직접 먹는 게 더 도움이 되었겠네요. 나는 진짜로 웃겨서 웃었다.
"무슨 열매인 줄 몰랐던 모양이죠?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쓰진 않았을 테니까요. 혹시라도 살아나면 다시는 복수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등신들. 복수하고 싶은 상대한테 존나 강한 치트키를 안겨주다니. 내가 그 해적이라면 죽어서도 원통해서 눈 못감을 거였다. 그러니까 악마의 열매 쓸 거면 쓰기 전에 정말 무해한 건지 확인해 봤어야지. 시발 아카이누가 마그마그 열매 처먹는 게 이런 방법일 줄이야
잠깐. 그러면 어차피 내가 안 구해도 누가 구했을 것 아닌가? 원작에서도 마그마그 열매 쳐먹고 살아있으니.
"...너는 왜 그 기회를 잡지 않았지?"
"무슨 기회요?"
"나에게 복수 할 기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어쩌라는 거야.
"뭐하러 그래야 하는데요?"
"하지만 네 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죽었다."
의외네. 이런 말을 꺼내다니. 지가 잘못했다는 생각 정도는 속으로 하고 있던 걸까? 나는 당연히 자기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조차 부정하고 스팬다인보고 등신새끼라고 비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요? 저도 저 때문에 중장님이 죽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건가요?"
사카즈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런데 그건 니고. 나는 나고. 나는 네녀석같은 싸패가 아니거든.
"뭔가 오해라도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는 중장님께 아무런 유감도 없어요. 복수할 생각도 없고 원망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중장님을 구한 건 순전히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양심에 따른 행동일 뿐이에요."
"본인이 인어 혼혈이라는 약점을 드러내면서까지?"
"...그게 뭔가 문제라도 되나요?"
내 말에 사카즈키는 무슨 헛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어... 어라? 들키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런가? 내가 반물고기인거 드러냈다간 사람들이 다들 스팬다인 전 장관... 반물고기랑 결혼했었다니... 수군수군 이렇게 되서 그런가?
"뭐... 그게 문제가 된다면 모른 척 해주세요.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해주시겠죠?"
"...충격을 받아서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그냥 쓰러진 거로 끝난 게 아니었나 보군."
"지금 대놓고 제 머리가 이상하다고 험담하시는 겁니까?"
나는 눈을 한껏 가늘게 떴다. 와 진짜 배은망덕한 새끼네. 그냥 죽게 내버려 둘걸 그랬나봐 진짜.
"지금 기억에 좀 혼란을 느끼긴 하지만 그래도 제 역할은 멀쩡히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라스키가 알아서 할 거니까. 흠.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짜 설득력이 없네. 기억 오락가락 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장관 일이 별거 없다는 것처럼 들리고. 괜히 말했다.
"장관님!!"
아. 라스키다. 무사했구나. 그는 커다란 담요를 나에게 둘러주고는 그대로 안아 들었다. 근데 저기 피흘리는 중장도 있는데.
"어서 가서 몸을 녹입시다. 저체온증이 올 지도 모르니까요."
물고기도 저체온증 걸리나? 나는 궁금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뒤에 있는 사카즈키가 나를 더 머저리 취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진짜 사카즈키한테 뭐 안 해도 돼? 배때기에 칼빵 맞은 거 같던데. 라스키는 신경쓸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사카즈키는 원망을 사는 것에 익숙했다. 저주와 증오의 말은 적에게서 뿐만 아니라 아군에게서도 받았다. 사카즈키는 그것에 어떤 죄책감도 느낀 적 없었다. 죄책감은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것이다. 사카즈키는 오로지 정의를 위해서만 움직였고, 언제나 최선의 행동을 했다. 그러니 모든 행동에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네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나는 지옥에도 떨어질거다!! 사카즈키!!"
사카즈키는 해적 한명을 목을 부러뜨려 바다에 던지며 인상을 썼다. 복수가 목적인 놈들인가. 귀찮게 되었군. 대부분의 해적은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약삭빠르게 태세를 전환해서 목숨이라도 구걸하곤 한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놈들은 하나같이 끝까지 저항하며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사카즈키는 해적들을 죽이며 번거롭고 짜증난다는 것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에게 무슨 원한을 갖고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냥 일이 더 길고 번거로워질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긴 칼이 배를 관통했을 때도, 독인지 뭔지 모르는 역겨운 액체를 뒤집어 썼을 때도, 제 발목을 잡아 끄는 놈 때문에 바다에 빠졌을 때도 사카즈키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몇번이나 죽음에서 기어올라왔다. 죽여도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거 같은 무력감이 온 몸을 지배했다.
바다의 저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었다. 이어서 떠오른 것은 어떤 열매의 정보였다. 바보같은.
그들은 정말로 사카즈키를 죽이기 위해 모든 수를 썼다.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해적들은 차례로 처리당하는 중이었고, 지원군은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누구도 사카즈키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사카즈키는 안 보인다 싶으면 적의 갑판을 뜯어내고 나오는 지옥의 사자였으니까.
이대로 죽는다면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사카즈키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정확히는 의미 없는 죽음이 두려웠다. 악을 섬멸하다가 맞는 죽음은, 한 점의 후회도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죽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사카즈키는 저를 보고 있는 어떤 것을 알아차렸다. 시야가 흐려져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 그 존재는, 희고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사카즈키는 그 손을 잡았다.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고, 산소를 한참이나 들이마신 후에 사카즈키는 손을 내민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물에 젖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핏기없는 얼굴에 달라붙어있었다. 스팬담. 고작 19살인, 세계정부의 장관.
그는 낑낑거리며 보트에 오르려고 애쓰고 있었다. 사카즈키는 그를 도와주었다. 철벅, 거리며 보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연보라색의 매끄러운 비늘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카즈키는 누가 볼세라 얼른 코트로 그것을 가렸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군. 장관은 축축한 머리카락에서 물을 짜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덕에 그의 흰 목에서 아가미가 서서히 닫히며 희미해지는 것이 잘 보였다.
세계정부의 장관이 인어와 혼혈이라니. 사카즈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어인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어인과 인어를 여전히 하등한 아인종으로 여기는 나라가 많았다. 세계정부의 주요 관직에 어인이나 인어가 앉은 전례는 없었다. 그들이 인어와 결혼한 것도.
만약 있다면 죽을 때까지 숨겨야 하는 일이었다.
"...왜 구한 거지?"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다. 장관은 왜 물어보냐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는 중장님은 헤엄도 잘 치신다면서 왜 가만히 가라앉고 계셨습니까? 그래서 시체인 줄 알았는데요."
"...이번 습격은 나에게 복수하러 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바다의 저주를 받으라고 하며 질퍽이는 반죽 같은 것을 내 얼굴에 던졌다."
"그래서요?"
"그게 악마의 열매였다. 머릿속에 그 열매의 이름이 떠오를 땐 늦었지."
"무슨 열매인데요?"
"...마그마그 열매라고 하는 군."
"허. 자연계 열매를 고작 바다의 저주 받으라고 써먹었다구요?"
차라리 직접 먹는 게 더 도움이 되었겠네요. 장관은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무슨 열매인 줄 몰랐던 모양이죠?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쓰진 않았을 테니까요. 혹시라도 살아나면 다시는 복수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웃고 있는 그 얼굴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사카즈키는 장관이 장례식장에서 저를 보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사카즈키는 그것이 곧 증오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올수록, 분노는 더 선명해 질 것이다. 사카즈키가 봐온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는 왜 그 기회를 잡지 않았지?"
"무슨 기회요?"
"나에게 복수 할 기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카즈키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해군에도, 세계정부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장관은 정말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마냥 얼굴을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뭐하러 그래야 하는데요?"
그 말에 사카즈키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직 지혈이 덜 된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죽었다."
사카즈키는 그 말을 하고 스스로 놀랐다.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약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러나 장관은 그 말의 꼬투리를 잡기는 커녕 고개를 살짝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래서요? 저도 저 때문에 중장님이 죽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건가요?"
사카즈키는 장관의 어떤 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 알았다. 그 표정이었다. 적의감이 하나도 없는,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 사카즈키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뭔가 오해라도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는 중장님께 아무런 유감도 없어요. 복수할 생각도 없고 원망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중장님을 구한 건 순전히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양심에 따른 행동일 뿐이에요."
그저 선의로 한 일이라고? 사카즈키는 믿을 수 없었다.
"...본인이 인어 혼혈이라는 약점을 드러내면서까지?"
잃을 게 없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선의를 행할 수 있다. 어른이라면 빠져죽지 않을 물에서 허우적 대는 아이를 구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일반적으로 미워해야 하는 게 당연한 상대를 구하는 것이라면.
사카즈키는 장관이 어떤 속셈이 있길 바랐다. 이게 고도의 계산을 통한 행동이고, 그래서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한 이기적인 행동이기를 바랐다. 그래야만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관은 고개를 갸우뚱 할 뿐이었다.
"그게 뭔가 문제라도 되나요?"
사카즈키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뭐가 문제가 되냐니? 백치라도 된 것인가? 그게 무슨 문제일지 모를 정도로? 사카즈키는 그 말을 내뱉기 전에,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정말로 그게 무슨 문제인지도 몰랐던 거라면. 그래서 그냥 순수하게 그를 구한 것 뿐이라면.
그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는 게 분노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면.
"뭐... 그게 문제가 된다면 모른 척 해주세요.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해주시겠죠?"
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고개를 눕히는 장관을 보고 사카즈키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성적으로는, 고작 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서지다니 정말로 나약한 정신을 지녔다고 비웃을 수 있었다. 또한 그런 불완전한 상태의 사람을 장관 직에 앉힌 세계정부를 향해 혀를 차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중에 이용하기에는 편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치명적인 약점도 알게 되었으니.
"...충격을 받아서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그냥 쓰러진 거로 끝난 게 아니었나 보군."
"지금 대놓고 제 머리가 이상하다고 험담하시는 겁니까?"
입을 삐죽이는 장관을 보자 사카즈키는 자신이 그의 약점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지금 기억에 좀 혼란을 느끼긴 하지만 그래도 제 역할은 멀쩡히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망가진 것은 자신의 탓이기 때문에.
사카즈키는 제 코트 안에 파묻혀 있는 장관을 보며 그에겐 책임이 있다고 한 센고쿠의 말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사카즈키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무척 이상한 느낌이었다.
ㅎㅎㅎㅎㅎ 19세 청장관은 [불쌍하게도... 돌아버렸군] 이라는 시선을 받지만 사실 정신적으로 제일 꿩강한 버전이라는 게 재밌지요 아마 신체나이가 같다는 게 어느정도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나중에 반쯤 죽었을 때 응급실에서 깨고 헉 죽으면 그냥 일어나는 거군! 하고 깨달은 다음에 그냥 꿈이라도 꾸는 기분으로 자기 목숨 신경 안쓰고 가볍게 다니며 남들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게 쓰고 싶네요
죽으면 진짜 죽는 게 아니고 가족한테 돌아가는 거야~ 이건 꿈 같은 거라구 같은 진실을 말했다간... 다들 [가엾게도... 돌아버렸군...] 하겠지요. ^^
인어라는 과다 설정은 걍 재밋으라고 넣어봤습니다. 가벼운 빙의물엔 역시 뭔가 버프가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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